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길을 걷다 도로 옆에 뚫린 어두운 하수구를 보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게 됩니다. "혹시 저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을 한 삐에로가 빨간 풍선을 들고 웃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력과 함께 말이죠.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그것(IT, 2017)>은 전 세계 수많은 어른들에게 잊고 지냈던 '삐에로 공포증(Coulrophobia)'을 다시금 일깨워준 무시무시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징그러운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해치는 뻔한 B급 슬래셔 무비라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 영화는 공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상처받고 소외된 아이들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끔찍한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눈물겨운 '성장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오늘은 데리(Derry) 마을을 피로 물들인 페니와이즈와, 그에 맞선 7명의 루저 클럽 아이들이 보여준 용기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해 봅니다.
1. 페니와이즈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거울"
영화 속 절대악인 '페니와이즈(빌 스카스가드 분)'는 일정한 실체가 없습니다. 그는 타겟이 된 아이들이 마음속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전염병, 불타 죽은 사람, 일그러진 그림, 학대하는 아버지 등)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납니다. 즉, '그것(IT)'은 물리적인 괴물이 아니라 아이들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형상화된 거울'입니다.
페니와이즈는 아이들이 공포에 질렸을 때 뿜어내는 아드레날린을 양분으로 삼습니다. 이 설정은 영화에 아주 깊은 철학적 은유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의 두려움에 굴복하고 피하려고만 할 때, 그 두려움은 점점 더 거대해져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삼킨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죠. 특수효과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괴한 안면 근육 연기와 섬뜩한 목소리 톤으로 페니와이즈를 완벽하게 창조해 낸 빌 스카스가드의 연기는, 이 영화를 현대 호러의 클래식 반열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입니다.
2. 루저 클럽 "진짜 공포는 어른들이 만든 현실에 있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페니와이즈보다 더 끔찍한 존재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방관하는 데리 마을의 '어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과잉보호로 아들을 병들게 하는 엄마,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아버지, 그리고 학교 폭력을 일삼는 불량배들.
주인공 빌을 비롯한 7명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이른바 '루저 클럽(Losers' Club)'입니다. 이들은 각자 어른들이 만들어낸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독은 판타지적인 괴물(페니와이즈)과 현실적인 괴물(무책임한 어른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아이들이 마주해야 하는 냉혹한 세상의 단면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이 영화가 명작 스탠드 바이 미(Stand By Me)의 호러 버전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연대와 직면 "두려움의 사슬을 끊어내는 마법"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하수구 깊은 곳, 페니와이즈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최종전입니다. 페니와이즈는 늘 그렇듯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각자의 환영으로 공포를 극대화하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이건 진짜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환영을 깨부숩니다.
빌이 동생 조지의 환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아이들은 비로소 과거의 상처와 결별합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이 공포를 극복하고 몽둥이를 치켜들자, 무적 같았던 페니와이즈는 오히려 아이들을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공포(Fear)는 먹이가 없어지면 그 힘을 잃는다는 이 단순하고도 강렬한 메타포는, 스크린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와 함께 삶을 살아갈 위로와 용기를 건넵니다.
결론 "삐에로가 남긴 기묘한 여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분 나쁜 찝찝함보다는, 힘든 사춘기를 함께 통과한 오랜 친구들을 떠나보내는 듯한 묘한 먹먹함이 남습니다. 손바닥에 피로 맹세를 하며 27년 뒤 페니와이즈가 돌아오면 다시 뭉치자고 다짐하던 아이들의 뒷모습이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맴도네요.
다가오는 주말, 단순한 킬링타임용 공포 영화를 넘어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빛나는 아역 연기를 감상하고 싶으시다면 <그것(IT)> 1편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단,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 길거리에서 하수구나 빨간 우체통을 마주쳤을 때 흠칫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페니와이즈는 언제나 당신의 가장 약한 틈을 노리고 있으니까요.